생각

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했다.

해먹과난로 2011. 3. 7. 08:53

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했다.

 

어느 아빠에게 예쁘지 않은 딸이 있겠는가? 사랑스러운 딸이 대학을 졸업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.

 

첫아이는 아들이었고 둘째이자 막내가 딸이었다. 내 두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생명을 안고 집으로 올 때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도 뚜렷이 기억난다. 게다가 바라던 딸이어서 그 기쁨은 정말 하늘을 나는 듯했다.

 

촌지

 

아이는 자유롭게 사랑으로 키우려 애를 썼다. 그러나 세상 일이 내 뜻대로만은 되지 않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두 세 번인가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작은 금액의 촌지도 주었다. 촌지는 부끄러운 일이라 정말로 안하고 싶었다. 그러나 워낙 대 놓고 아이를 구박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어서 두 세 번쯤 굴복하여 작은 금액의 봉투를 전달하였다. 촌지 바로 다음 날부터 선생님 칭찬 받고 밝게 뛰노는 딸아이를 보며 마음이 아팠고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으로 남는다.

전에 국회에서 한나라당 의원이 질문하기를 경찰 조서에 다 자백해 놓고 이제 와서 그 많은 증거들을 다 부인하느냐 하니까, 근태의원님께서 그랬다. 고문 당해 보셨나요? 이 한 마디에 모두 조용히 입 다물 던 일이 생각 난다. 촌지 안가져 온다고 선생님이 신인 줄 아는 어린 아이를 구박하는 짓은 이근안경감의 고문에 비할만했다.

 

3학년 담임선생님

 

아들도 그랬지만 딸 아이도 공부보다는 건강하게 놀며 성장하기를 바랐다. 당연히 학원도 아이가 원하는 과목 몇 개만 보냈다. 그러다 보니, 방과 후 아이가 동네 놀이터에서 혼자 놀게 되었다. 친구들이 다들 학원 다니느라 전혀 자유시간이 없으니 같이 놀 친구가 없던 것이다.

 

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아내가 담임 선생님께 불려 갔었다. 담임선생님 말씀이 가관이었다. 같은 반 친구 엄마들이 항의를 했단다. 우리 딸 아이가 자신의 아이들을 놀자고 불러 내어 공부에 방해 된단다. 이 젊은 여선생님 왈 우리 딸아이가 공부도 안하고 아이들을 꾀어 내는 이상한 아이란다.

 

아내도 나도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다스리느라 고생하였지만.. 참 씁쓸한 일이었다. 그래도 우리의 생각은 변하지 않아 학원으로 아이를 돌리는 일은 싫어서 딸 아이를 설득하여 놀이터에 친구가 없으면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도록 하였다.

 

그 덕인지 아이가 4학년 올라 갈 때 그 젊은 3학년 담임 선생이 마지막 인사하는 날에 눈을 피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 아이가 똑똑한 아이라고 하였다. 마지막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고마우나, 그 동안 잘못 된 평가와 아이에게 상처를 준 부정적인 말을 생각하니 속 좁은 마음에 용서가 되지를 않았다.

 

이웃집 엄마

 

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이야기이다. 이웃에 이름이 예쁜 아이가 있었다. 참 예쁜 한글이름이라서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동네 아이였다.

 

초등학교 1, 2 학년쯤으로 기억하는데, 아이 엄마는 엄청난 교육열로 아이를 키웠다. 무용 피아노 영어 수학 태권도.. 그렇게 많은 과목을 동시에 가르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. 그리고 성적 나오지 않는다고 아이를 잡는데 동화 속의 계모들이 전처 소생을 막대 걸레로 찌르고 때린다는 글은 읽었어도 성적 나쁘다고 자기 딸을 대걸레로 찌르고 고양이 쥐 잡듯이 닥달하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. 내 눈에는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.

 

엄마 그렇게 하면 XX 죽어!! 아이는 이렇게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였지만, 애당초 아이의 불평을 들을 엄마가 아니었다.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아동학대로 처벌받을 일이었으나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재벌과의 결혼을 제외하면 신분상승의 유일한 사다리인 교육에 과도하게 올인하는 부모들은 흔하게 볼 수 있었다.

 

그 아이도 지금쯤 대학을 졸업할 나이인데, 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치유되었는지 걱정이 앞선다. 이웃집 아이는 얼마나 큰 상처를 안고 살아 갈까?

 

미대

 

딸아이는 어려서부터 옷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. 코스프레 놀이를 한다고 마법 지팡이 같은 소도구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써서 땀을 흘리며 몇 번의 퇴짜 끝에 간신히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. 어느 날 옷을 직접 만드시겠단다. 지금도 잘 돌아가는 부라더 전동 미싱을 사주었다. 당연히 두 번 돌려 보고 그 이후로는 케이스에 모셔져서 잘 보관되고 있다.

만화를 잘 그리던 딸아이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우겨서 간신히 어르고 달래어 아파트 단지 내의 여고에 진학시켰었다.

 

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셔서 아이가 아빠처럼 잘 따르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. 딸아이 고교 졸업식 날에 이 선생님께 좋은 만년필에 존함을 새겨서 드렸더니 정말로 좋아하시던 기억이 새롭다.

 

자신이 좋아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까지 하니 대학진학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. 그림 그리는 일 만화 그리는 일 디자인하는 일 모두 너무 즐겁단다. 그러면 그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좋을 수 밖에 그래서 미대 디자인 학과로 진학했다.

 

딸은 모 패션 잡지사에서 수습 사원으로 이제 사회의 첫발을 내딛는다. 이공계 출신인 나는 잘 모르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디자인 계통의 첫 봉급은 너무 박하기만 하게 보인다. 그렇지만 어쩌겠는가?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란다.

그러다 보면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또 좋아하는 사람도 만나고 하겠지.

 

그렇게 사랑도 찾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. 아빠의 바램은 단순하다.